USB-C 충전기 하나로 노트북도, 휴대폰도, 이어폰도 충전하는 시대다. 규격이 통일될수록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집 안엔 여전히 규격이 제각각인 물건이 훨씬 많다.
라이트닝 포트와 USB-C
TTA 24핀으로 핸드폰 충전기 규격을 하나도 맞추는 표준 규격이 있던 시절이 있다. 아이폰 3GS와 스마트폰을 거치며 이런저런 포트가 다시 등장했으나, 이제는 다시 USB-C로 동기화되고 있다. 안타까운건, 내가 아이폰 SE2와 아이패드 미니2를 버리지 않는 한 라이트닝 포트는 계속 써야 한다는 점이다.
USB-C 타입을 쓴다는 자체도 어디까지나 모양과 기본 프로토콜이 그럴 뿐이다. 내가 쓰는 POCO폰은 USB-C 타입 모양이고 USB-C 타입 그대로 쓰기도 하지만, 독자 전력 규격을 더 추가한 충전기를 쓴다. 그나마 구형 POCO폰이라서 유선 충전시 67W인거지, 새 POCO를 쓰면 유선 100W던가.
뭔가 규격을 통일했지만, 통일하지 못한 느낌이다.
프린터기와 잉크
프린터기와 잉크가 이런 규격 제한을 철저하게 느끼게 하는 시초가 아니었을까? 면도기와 면도날도 마찬가지고. 잉크나 면도날을 살 때 규격에 맞는 품목만 골라야 했다. 프린터기 잉크는 브랜드를 넘어 제품마다 잉크 규격이 달랐던 느낌이 강했다. 지금도 모든 프린터기가 한개 잉크 규격을 쓰진 않지만, 나름 몇 종류안에서 쓰도록 정리가 됐거나 규격과 무관히 쓰는 정품 무한잉크 제품도 나왔으니, 잉크 카트리지로부터 자유가 조금 생겼다. 차라리 지금은 장시간 쓰지 않아 말라 붙어 굳어버리는 잉크 노즐이나 토너가 좀 더 깝깝한 문제가 됐다.
캡슐 커피
아침에 일어나 한잔 마시는 캡슐 커피에도 규격이 있다. 네스프레소 오리지널, 네스프레소 버츄오, 네스카페 돌체구스토, 카누 바리스타, 일리 캡슐, 일리 파드, 카피탈리 등등 몇 종류 없을 것 같으면서도 이미 한 없이 규격이 늘었다. 물론 네스프레소 오리지널이 여러 호환 커피 캡슐을 주도하긴 하지만, 나만해도 네스프레소 오리지널과 카누 바리스까지 모델 2개를 쓰기 때문에 커피 캡슐을 번갈아가며 두 종류를 구매한다.
네스프레소 오지지널 호환품 등장은 생각보다 규격으로 인한 불편함을 많이 해소해줬다. 일리 캡슐을 먹으려면 일리 머신을 썼어야 했지만, 이제는 일리 커피도 네스프레소 호환 캡슐로 판매한다. 카누 바리스타는 독자 규격과 네스프레소 오리지널 규격간에 판매하는 커피 블렌드가 달라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난 애초에 머신을 두 종류 쓰면서 아쉬움을 커버하고 있다.
핸드드립 드리퍼
핸드드립 드리퍼도 결국 규격 문제다. 하리오 v60은 깔때기 원추형 필터를 써야하고, 칼리타 웨이브는 플랫형 필터를 쓴다. 그리고 내가 주력으로 쓰는 칼리나는 사다리꼴 필터를 쓴다. 필터를 한번 살 때 50장이나 100장 묶음을 사게 되는데, 한 번 사면 그걸 다 쓸 때까진 다른 필터를 쓰기가 꺼려진다. 뜯은 걸 먼저 다 쓰고 새걸 뜯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 심리일테다.
핸드드립 드리퍼 규격을 따지기 싫다면, 규격이 없는 모카포트나 프렌치프레스나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을 쓰면 된다.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은 포터필터 규격에 맞춰서 여러 악세사리가 따라 붙으니,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이어야만 규격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샤워기 헤드와 필터
샤워기 헤드는 통용되는 나사선 규격이 있다. 샤워 호스도 그렇고 교체가 필요한 경우, 해당 부품만 교체해서 쓰기 쉽다. 이와 달리 샤워기 헤드 안에 넣는 필터는 각 제품별 규격이 다르다.
아무리 새 집에 살더라도 내 집에 깔린 수도관이 새 관일 뿐, 내 집까지 오는 상수도관은 동네의 역사와 함께 세월을 보냈다. 그로 인해 샤워기 헤드에 필터를 넣은 제품을 쓰는 집이 늘고 있다. 어디 샤워기에만 넣으랴. 주방에도 넣고 세면대 수전에도 넣는다. 누래지는 것과 별개로 안에 걸러진 쇳가루나 이물질을 볼 때면, 필터를 참 잘 썼다고 자화자찬할 때가 많다.
커피, 프린터기와 달리 샤워기는 규격으로 인해 은근 발목잡힐 때가 있다. 규격에 맞는 제품을 계속 사고 싶으나, 해당 회사가 망해서 사라질 때다. 고장나지 않은 샤워기 헤드를 필터 없이 쓸 순 없다. 그런데 그 회사만 규격에 맞는 필터를 생산하다보니, 필터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샤워기 헤드까지 다 교체해야 한다. 프린터기 잉크가 단종됐으니, 프린터기 자체를 바꿔야 하는 상황인거다.
다시 제품을 선별하고 고를 때, 이번엔 사라지지 않으리란 희망을 위한 평가까지 해야 한다. 코스트코나 다이소 등에 입점한 제품이 긴 세월 지속 출시를 해줄까? 그걸 누가 알겠는가. 결국 한번 살 때 필터를 미리 잔뜩 사두고, 단종됐을 땐 과감없이 새 샤워기 필터를 고르자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리퀴드 모기약
우리집 모기가 많이 아프다. 그래서 미리미리 초여름 직전에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풀가동후, 겨울이 거의 다 되서야 휴식기에 들어간다. 여름 한정 필수품이라기엔, 여름이 좀 길다. 어쨌거나 모기약을 고를 때도 훈증기에 맞춰서 모기약을 사야 한다. 즉, 훈증기는 사실상 모기약 제조사가 무상으로 막 뿌려도 될 수준이다. 훈증기 자체에 특별한 센서나 기능이 복잡다양하게 들어갈 일도 별로 없고, 일관성있게 액상 모기약을 증발시켜서 넓게 펼쳐주기만 하면 된다.
다른 집에선 어떤 모기약을 쓰는지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각자 본인 선택 기준이 있겠지만, 가끔 나는 다른 모기약은 효과가 어떤지 궁금증이 생긴다. 하지만, 훈증기까지 따로 구매해야 하는 불편함과 귀찮음으로 인해, 그냥 기존에 쓰던 제품을 그대로 재구매한다. 대략 브랜드 기준으로 홈매트, 해피홈, 에프킬라가 있다. 다이소에 파는 네오큐라는 브랜드 제품은 이게 은근 품절이 잦다. 재입고가 되긴 하는데, 확실히 재입고가 될 것인지 아닌지 불안감은 항상 있다. 샤워기 헤드 느낌인거다. 결국 대기업 제품으로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정수기 필터
정수기 필터도 규격 제한이 상당히 쎄다. 브리타 필터 모양에 딱 맞게 물이 새지 않는 통이 정해져 있다. 브리타 호환 필터도 있긴하지만, 정작 브리타 필터를 꽂을 수 있는 다른 호환 피처를 본 적은 없다. 희안하지 않은가? 브리타가 여러 사이즈 피처를 판매하긴 하지만, 필터가 아니라 피처도 호환품이 있을 법한데, 없다. 네스프레소 오리지널로 떠올려보면, 캡슐 머신과 캡슐 양쪽 모두 호환품이 나오면 사용자 선택지는 정말 넓어질 수 있는데…
내가 쓰는 자가 교체 직수형 정수기 필터도 딱 이 회사의 제품에만 고정돼 있다. 내가 쓰는 브랜드 안에서도 제품별로 필터가 다르다. 대충 8년정도 썼나 싶어서 이제 단종 단계까지 가려나 싶었으나 다행히 최근에 이 필터를 쓰는 신제품이 출시됐으니, 한 숨 돌렸다.
찾아보면 무수히 널렸다
온갖 전자 제품의 전원 포트나 충전 포트도 중구난방이다. 전압과 전류량과 별개로 애초에 그 동그란 포트 크기가 다르다. 그나마 노트북은 USB-PD 타입으로 대충 통용되기 시작했다. PC는 워낙 표준화가 잘 된 제품이라, 딱히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대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AA와 AAA 타입 건전지만 쓰는 기준으로는 정말 좋고 편한 규격이라 생각했었다. 파나소닉 껌전지를 쓰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쓰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건전지 규격이 AA와 AAA 타입 말고도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음을 깨우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규격이라는 것도 종류가 많아지면, 사실상 불편해진다. 차라리 충전식 제품으로 바뀌면서 충전 포트가 다시 규격 한 가지로 맞추는 게 편하다.
우리는 규격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지만, 규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호환 환경 속에 살고 있다. 표준 규격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독자 규격은 특정 제품 생태계 안으로 이끈다.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오래 사용할수록 호환되는 쪽이 반갑다.
수많은 규격과 호환 사이에서 가장 덜 불편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