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줄이기 위해 커피 시음 노트를 쓴다

네스프레소 오리지널 캡슐을 주로 먹은지 10년쯤 되니, 캡슐을 주문할 때마다 고착화되는 선택지가 생겼다. 그렇다고 늘 고정해서 먹는 건 지겹고 아쉬웠다. 거기다 시즈널 캡슐이나 신규 캡슐이 종종 출시되니, 주문할 때마다 여러 종류를 바꿔가며 주문했다.

문제는 내가 캡슐별 맛과 선호도를 까먹는다는 점이었다. 출고 가격도 점점 오르는 판에, 선호도가 낮은 캡슐이 섞일 때 그 실망감은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

커피 취향 찾는 네스프레소 이벤트도 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주로 네스프레소 공식홈에서 주문하는 나로서는, 네스프레소 사이트의 지루한 딜레이는 항상 스트레스였다. 기억 나지 않는 맛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하나하나 설명을 다시 읽으려면 느린 로딩 속도를 버텨야 했다.

나는 주로 캡슐 커피는 아이스를 먹는다

분명히 선호하는 맛과 향은 있다. 그런데, 캡슐 커피를 마시는 루틴은 맛과 향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하면서 마시는 한잔은 아이스였다. 어느샌가 제빙기가 생겼고, 제빙기 이후로는 하루에 캡슐 1잔은 꼭 아이스로 마셨다.

똑같은 캡슐이더라도 아이스로 마실 땐 뜨겁게 먹을 때와 맛과 향이 달랐다. 온도로 상쇄되는 맛과 향은, 뜨거울 때와 맛 밸런스를 바꿨다. 그리고 캡슐은 어느새 거의 아이스 전용이 됐다. 그 와중에, 네스프레소나 네스프레소 호환 캡슐을 판매하는 곳에선 아이스 전용 또는 아이스 추천 캡슐을 따로 출시했다. 바야흐로 아이스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두번째 파도가 올 준비

커피스퀘어에서 얻었던 첫번째 개안 이후로, 엄청난 차이를 체감한 일은 오랫동안 없었다. 근 10년 가까이 흐른 후, 새 계기가 왔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지인 형과 우연히 들렀던 김포의 라빅커피에서 매우 인상적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났다. 그 형과 동시에 그 맛이 에어레이션 효과인지, 단순히 더운 와중에 먹어서 입에 착 감겼던 건지, 원두가 정말 잘 맞는 건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후에 몇 번 더 가면서 비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익숙해지면 감동이 줄어드는 걸까? 점점 뇌리에 박혔던 그 인상이 반감되면서 비법 찾기는 잊고 원두가 맛있다는 기억만 남았다.

그래도 라빅커피의 ‘디 오리진’ 블렌딩 원두는 집에서 내려먹어도 비슷한 맛과 향을 내는 확실한 안전빵 원두가 됐다.

두번째 파도가 몰아쳤다

내가 머무는 문래동엔 참 많은 가게가 생기고 사라진다. 철강 공장 사이사이에 밀려드는 가게를 보다보면, 확실히 가게가 몰리는 구역과 그렇지 못한 구역이 분리돼 있다. 점점 방문객이 몰리면서 여유롭게 드나들던 가게에 들어가기 어려운 날이 많아졌다. 사람이 덜 붐비는 곳을 찾다보면,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야 했다.

투표를 하고 돌아오던 중, 유동인구가 몰리지 않는 구역에서 카페인지 아닌지 겉에선 구분이 잘 안 되는 카페를 찾았다. 카페 렁(LENT). 어떤 카페인지 모르니, 우선 집에 돌아와서 방문 리뷰를 찾아보기로 했다. 뭔가 상당히 긱한 매력이 있는 카페였다. 그리고 다시 방문할 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카페 렁. LENT. 처음엔 가게 이름도 못 찾아서 지도를 한참 뒤졌다.

지인과 저녁을 먹고, 가보자고 꼬셨다. 도착해서 처음 마셨던 웰컴샷, 그리고 시향 후 고른 핸드드립은 텍스트로만 마주했던 그런 설명이 가능한 커피였다. 두번째 파도가 왔다. 이런 맛이 나오는 커피가 있구나? 딥 임팩트 그 자체였다. 확실히 한잔한잔 가격은 일반 기성 가게보다 비싼 건 맞지만, 이 커피 한잔을 들이키는 순간 그런건 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웰컴샷을 마시는 순간, 혹하기 시작한다.
둘이 가면, 꼭 서로 다른 원두를 고르고 나눠 마신다. 좋은 건 나눠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 난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일정 금액 이상의 비싼 원두는 내 손이 아니라 장인의 손을 태운 커피로만 먹겠다고. 내가 아무리 잘 내려봐야 아이템을 쓰는 장인을 이길 수 있으랴. 좋은 건 확실히 더 좋게 먹자 싶었다.

그런데, 카페 렁도 점점 사람이 붐벼서 그냥 지나치는 날이 늘고 있다. 갈 수 있을 때 최대한 가둬야 할까?

내 손에 맡기는 걸 허용할 원두를 기록하자

음식점 방문 후기는 흔한 기록이 된 시대다. 다시 방문할 집과 다신 방문하지 않을 집을 나눈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캡슐과 핸드드립 둘 다 실패할 원두를 다시 고르지 않기 위해서 어딘가 기록을 남겨야겠다 싶었다. 유명 바리스타나 인플루언서가 남기는 노트를 보면, 이게 정말 느껴지는가 싶은 수준으로 나는 이해하지 못한 영역까지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세세한 노트를 적을 수준은 아니니,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포인트를 기준으로 간단히 정리하기로 했다. 어차피 모르는 건 남겨봐야, 무의미하다. 다시봐도 내가 모를테니, 내가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남겨야 한다.

우선은 구글 스프레드 시트에 정리하기로 했다. 로스팅한 곳에서 의도한 컵노트나 설명이 뭔지 하나하나 옮기고, 내가 먹어보니 어땠는지 또는 의도에 근접하기 위한 추출 레시피가 무엇인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초반엔 시행착오를 조금 겪었지만, 그냥 천천히 하나씩 채우는 중이다. 과거에 먹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아 지금은 채울 수 없는 빈칸을 보면, 과제 같다는 느낌도 든다.

빈칸을 채워봐야, 새로운 빈칸이 생긴다.

그런데 막상 남기다보니, 캡슐도 원두도 종류가 너무 많았다. 다시 구할 수 있는 원두인지, 변하지 않는 블렌딩인지, 꾸준히 계속 구할 수 있는지 등등이 기록을 남길 기준이어야 하는가 고민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리 과정에서 인스턴스 커피인데도 리뉴얼로 맛이 바뀐 사례를 찾기도 했다. 결국, 내가 접한 최초의 순간에 남은 인상이 추후에 재구매를 유발할 여지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리뉴얼을 한다고 한들, 어차피 제품명 자체로 내가 리뉴얼 여부조차 안 찾아보는 커피가 되려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커피를 내가 다 맛볼 순 없다. 실패를 최소화하겠다는 목표 달성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