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하게 만나, 쓰게 알게 되고, 향기롭게 친해진 커피의 진면목

2026-06-13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문득 입이 심심할 때, 가장 편하게 찾는 음료가 물이 아니라 커피가 됐다. 물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물을 일부러 챙겨먹지 않으면, 온전한 물을 마시는 횟수가 커피보다 적은 날이 있기도 했다. 커피란 녀석은 언제부터 내게 이렇게 찰싹 달라 붙어있었을까?

분명 달달한 믹스 커피가 시작점이었다

확실히 기억한다.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고등학생까지, 집에는 커피라 부르는 음료는 분명히 달달한 믹스 커피가 전부였다. 더 어렸을 땐, 커피, 프림, 설탕을 조합해서 먹는 것이 당연했고,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TV 광고에도 믹스 커피 또는 캔커피가 대부분이었단 기억만 남는다.

지금은 그 커피가 동결 건조 커피와 RTD(Ready To Drink) 액상 커피라고 분류해서 부를 정도가 됐지만, 그땐 그냥 그런 달달한 커피가 커피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 자주 먹지도 않았다. 내 기억에는 일부러 찾아서 사먹는 음료가 고등학교땐 아침햇살 정도였고, 친구들이랑 농구하고 나서는 포카리스웨트, 게토레이, 2% 부족할 때 정도를 먹었다. 커피는 내게서 확실히 멀리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아메리카노를 처음 만났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가볍게 배울 생각으로 부산대학교 앞에 있던 일본어 학원을 한두달 다녔다. 그때, 같은 반에 있던 아주머니께서 수업이 끝나고 차나 한잔하고 헤어지자며 우리 반 사람들을 모아서 갔던 곳은 스타벅스였다. 지나치면서 종종 봤던 매장이긴 했으나, 친구들과 PC방이나 운동장에서 놀던 게 전부였던 나는 처음 그곳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면서 뭘 골라야 하는지도 몰라서, 음료는 그냥 그 아주머니가 주문하는 것을 따라서 주문했다. 내 눈엔 그저 쇼윈도우 냉장고속 당근 케잌과 뉴욕 치즈 케잌만 들어올 뿐이었다.

확실히 기억한다. 그날 먹었던 아메리카노를 요즘 먹는 아메리카노와 비교하면, 연했다. 혹은 그 아주머니의 주문 레시피가 연하 맛이었으려나? 그래도 쓴 맛만 기억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모금에 케잌 한 스푼씩 푹푹 찍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서면에 새로 생긴 교보문고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면서 커피빈에 친구랑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뭔가 겨울이었나 살짝 찬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거기선 커피를 주문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뭘 먹었더라?

대학교 입학 후에도 딱히 커피를 찾진 않았다

대학교 입학 후, 자취를 하면서 집에 항상 구비돼 있던 건 믹스커피였다. 군대에서도 자판기에서 나오는 믹스커피였고, 제대한 후에도 집엔 믹스커피만 있었다.

언젠가 커피없이 프림과 설탕만 타서 먹어봤다. 그것도 정말 달달하니 맛이 좋았다. 어쩌면 난 그저 달달함을 원했던 것일 뿐, 커피가 주는 구수함이나 쓴 맛을 원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인 휴게실에서 먹은 것도 자판기 커피였고, 간혹 선배들이 카페를 데려가도 원두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마셨다. 아마도 대학시절엔 쓴 맛은 커피보단 술에서 더 많이 접했지 않았나 싶다. 소주의 쓴 맛이 커피의 쓴 맛과 같은가? 같지 않다. 허브차의 쓴 맛과 같은가? 같지 않다. 난 그냥 음료를 먹는다면 그건 달달함을 먹는다는 개념이었던 것 같다.

졸업 즈음부턴 학습형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도 커피빈이었던 것 같다. 졸업 학기를 앞두고 센트럴에 들렀다가 버스를 기다리며 커피빈에 들어갔다. 이땐 이미 알고 있었다. 커피빈 같은 카페에 오면, 카페모카를 주문하면 된다는 사실을. 카페모카와 카페라떼를 구분해서 외우는 데도 꽤 걸렸던 느낌이긴 하다.

어쨌거나 그날은 틀리지 않고 카페모카를 주문해서 테이블에 앉았는 데, 뒷 테이블의 여성분들 이야기가 들렸다. "커피향 너무 좋아. 난 커피향을 아는 남자랑 만날거야." 그분들 이야기가 정말 뜬금없이 뇌리에 꽂혔다. 뭔가 긴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딱 저 맥락인 이야기만 꽂혔다. 이젠 쓰다라는 것을 참으며 원두 커피를 마셔야 하는가 싶었다.

그날 이후, 카페에 갈 일이 생기면 원두 커피를 마셨다. 이게 어디서 온 원두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블렌드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마셨다. 쓴가? 가게마다 쓴 맛이 조금 다르다는 건 인지했지만, 그냥 학습형이다. 마셔야 한다. 크리스피크림에서도 당당하게 원두 커피를 주문해서 같이 먹었다. 희안하게 원두 커피를 먹으면서 새로운 여성분들과 인연이 생기기도 했다. 학습 효과였을까?

사회로 들어오니, 이젠 포션 싸움이 됐다

제대로 된 사회 생활을 시작했던 회사에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서 10시까지 출근하면, 밤 10시에 퇴근했다. 집에 돌아와서 11시쯤되면 빨래를 하고, 자정부터 새벽 1~2시 사이엔 자사 서비스 모니터링하다가 잠들고. 그러기를 반년 넘게 반복했다. 커피든 물이든 뭐 딱히 신경쓸 틈도 없었다. 그냥 눈 앞에 보이는 액체를 마셨고, 회사엔 믹스 커피 뿐이었다.

그때 회사 앞 학동역 근처엔 세븐 몽키스랑 커피빈이 있었는데, 내 기억에 거길 내 의지로 갔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어차피 카페에 앉아서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집에 가기 바쁜데 무슨 카페를 가랴.

그저 귀에 들리던 이야기는 빨간색 코카콜라는 HP 포션, 파란색 펩시콜라는 MP 포션, 검은색 콜라는 포이즌 포션(?)이라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이직하면서 캡슐 커피를 만났다

몸이 너무 갈리는 회사를 나와, 당시 지내던 집에서 오가기 편한 곳에 있는 회사로 옮겼다. 첫 출근날 배운 건 캡슐 머신 사용법이었다. 입사 전엔 전혀 몰랐는데, 그 회사는 일리 캡슐 커피가 사실상 무한히 제공되는 회사였다. 무려 캡슐 종류도 3종류였다. 빨강 캡슐, 갈색 캡슐, 초록색 캡슐. 캡슐 3가지 차이가 뭔지 왜 그땐 안 찾아봤던걸까. 그냥 번갈아가며 먹을 뿐, 처음엔 깊이 찾아볼 생각을 안 했다.

캡슐 한잔 내려서 적당히 뜨거운 물과 섞으면 끝.

아침에 출근해서 캡슐 커피 한잔 내려서 자리에 앉아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침에 커피 한잔 책상 위에 올려놔야, 하루가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후에도 한잔을 추가해서 먹었고, 퇴근 전에도 한잔 더 먹었다. 지금이야 용량 계산을 할 줄 아니까, 그때 그렇게 하루에 3샷을 먹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땐 그게 내가 하루에 뭘 얼마나 먹고 카페인이 어떻게 섭취되는지 전혀 생각을 안 했다. 하루에 3샷이 많아 보이는가? 요즘 매장의 흔한 아메리카노 레시피는 기본 사이즈 1잔당 2샷이다. 사이즈 올리면 3샷이다. 긴 시간을 뜨겁게 먹으면서 3샷을 먹던 시절이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단시간에 2~3샷을 먹는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라이트하지 않은가?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일리 캡슐 머신.

회사 근처 커피집 사장님께 에스프레소를 배웠다

여기서부턴 이제 배웠다고 해야 딱 맞다. 대학교 친구가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그 친구 회사 옆에 맛있는 카페가 있다고 해서 놀러갔다. 이미 그 친구가 사장님과 안면을 다 튼 상태였고, 다들 퇴근한 시각 이후라 가게 마감을 하기 직전이었다.

그땐 이름이 커피스퀘어였는데, 후에 그럼블 커피로 리브랜딩도 하셨다. 그러블 커피는 매장 위치가 바뀌었고, 사장님도 바뀌었다.

문득 사장님이 에스프레소 한번 먹어보겠느냐고 권하셨다. 그거 무지 쓰기만 하고 왜 먹는지 모르겠다 싶었으나, 사장님이 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케냐와 에티오피아를 한잔씩 내리고, 설탕을 한포씩 주셨다. 위에 올라온 크레마 위주로 쓰읍 마시면서 일단 두 원두가 내는 다른 향과 얕은 맛을 보라고. 그리고 설탕을 에스프레소에 넣은 후 잔을 흔들기만 해서 녹인 후에, 에스프레소를 먹어보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잔 바닥에 남은 덜 녹은 설탕을 입에 털어 넣으라고. 고진감래. 분명 그날 나는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는 처음 먹었다. 이게 단순히 쓰기만 한게 아니란 것도 처음 알았다. 원두 원산지에 따라 특징이 있고, 맛과 향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냥 모든 게 처음이었다.

커피스퀘어 에스프레소.

앞으로도 에스프레소를 먹으란 게 아니라, 이런 차이가 있고 이게 희석되서 들어가는 거니까 그걸 생각하고 아메리카노를 먹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 주말엔 홍대나 합정에 있는 로스터리 카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먹던 일리 캡슐 커피가 어떤건지 찾아보게 됐다.

2013년에 들렀던 노피디네콩볶는집.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의 차이가 시작된 날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이 뒤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