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프레스를 최초 설치하면 twenty series 테마가 기본으로 따라온다. 보통 설치하는 시점 기준에 맞는 워드프레스 코어와 맞춘 기본 테마로 맞춰진다. 혹시라도 과거 테마를 본 적이 있거나 써본 적이 있어서 적응이 힘들어 과거 버전을 쓰고 싶다면, 그건 과거 버전이 아니라 과거에 있던 twenty series 테마였으니 하나하나 테마를 검색해서 새로 설치해서 활성화하며 찾으면 된다.

아마도 twenty 시리즈 자체를 처음 겪는 사람이라면 답답함이 끓어오를 테다. 뭔가 하나 바꾸려는데, 그게 어디서 영향받는 건지 어디를 바꿔야 하는지, 바꾸는 이 설정값이 어디까지 영향을 끼치는지 찾기가 너무 힘들다. 불친절 그 자체다. 이상하게 워드프레스 자체는 커뮤니티도 넘쳐나고, 플러그인도 넘쳐난다는데, 왜 기본이라는 이 twenty series 테마는 왜 자세한 설명을 정리해 둔 레퍼런스 문서조차 없는 걸까.

그렇게 테마 검색창에서 여기저기 기웃대고,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예시 쇼케이스를 보다 보면 제일 먼저 빠지는 유혹이 Pre-made 테마다. 색깔이나 이미지만 쓱쓱 바꾸면 내 홈페이지도 그 예시 데모 페이지처럼 바로 바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불과 몇 클릭 정도만 소모한다. 왜 내 것은 저렇게 안 될까.

무료 빌더와 유료 빌더

테마를 이야기하면 빌더가 꼭 따라온다. twenty series 테마에는 엄밀히 빌더가 없다. 빌더 기능을 최소화해서 테마와 일체화돼 있고, 워드프레스 코어와 최대한 밀착돼 있다. 그래서 코어 특징과 UX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만약, 테마 검색에서 나왔던 데모 페이지처럼 맞추고 싶다면, 데모 페이지로 나오는 페이지 1~2개만 세팅해서 색깔과 이미지를 변경하면 맞출 수 있다. 다른 욕심을 버려야 한다. 여기는 선을 2px로 굵게 하고 싶다거나, 좌우 폭을 바꾼다거나, 헤더 메뉴 모양을 바꾼다거나 하고 싶다면 신세계를 탐험할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테마 만드는 프로가 아니다

신세계를 탐험하기에 앞서, 일단 내 자신부터 되돌아본다. 나는 이 테마의 PHP와 CSS 구조를 파악해서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AI를 써서 낄끼빠빠한다? 아니다. 그럼, 테마 업데이트할 때마다 더 빡세게 AI랑 놀아야 한다. 테마 자체를 이해하고 쓰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면 아쉬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차피 들여야 하는 최소한의 리소스가 있다면, 이왕이면 길게 쓸모가 남을 곳에 넣자. 확실히 내가 원하는 수정 기능도 있으면서 허들도 낮은 테마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빌더와 첫 조우를 한다.

무료 빌더

빌더를 검색한 건 아니었다. 그냥 테마를 검색해서 하나 설치했더니, 뭔가 기본 상태에서는 못 봤던 버튼이 여기저기 뜬다. 비주얼 컴포저, 사이트 오리진 등등 검색해 보면 무료로 그냥 쓸 수 있는 빌더고 프리미엄 기능만 유료라고 한다. 이때 유료의 법칙이 등장한다. 이상하게 내가 수정하고 싶은 부분은 다 자물쇠로 잠겨있다. 결국 자물쇠를 풀려면 프리미엄 유료 결제를 하거나, AI와 함께 한세월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사실 AI 이전에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거라, 지금은 한번 해볼 만할까 싶은 생각도 불현듯 든다. 하지만 버릇이 그렇지 않으니, 관성에 이끌려 애초에 무료 빌더는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무료 빌더는 워드프레스를 별로라고 생각하게 하는 가장 첫 장벽이다. 딱 여기 조금만 수정하면 될 것 같은 거길 딱 막고 있다. 기존 서비스형 블로그에서는 애초에 그런 자유 자체가 없었는데, 정작 자유롭다고 하면서 자유를 못 누린다고 하니 얼마나 실망이 큰가.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한방에 주저 앉는다. 여기서 그냥 포기하고, 서비스형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아마도 십중팔구 아닐까 싶다.

유료 빌더

모든 절망을 이겨내고 기능 언락을 위해 결제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 막상 돈을 쓴다고 생각하니, 그럼 정작 돈을 내고 쓸 수 있는 것에는 다른 다양한 건 뭐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본격적으로 온갖 광고와 전쟁이다. 유료 빌더를 소개하는 글을 보며, 이게 광고 글인지 진짜 후기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문득 맨 처음 세웠던 목표가 떠오른다. 이미지랑 색깔만 쓱쓱 교체하고, 틀이나 그런 건 특별히 모나지만 않으면 그냥 바로 쓰고 싶었던 그 최초 목표가 떠오른다.

유료 빌더가 제공하는 기본 템플릿 중에서 정말 딱 그렇게 생긴 테마를 찾는다. 그렇게 생애 최초 해외 결제로 워드프레스 빌더가 하나 생겼다. 2016년이었던가? 내가 처음 구매했던 빌더는 비버 빌더(Beaver Builder)였다. 타일 형태의 프론트 페이지를 클릭 한두 번으로 구성할 수 있었고, 헤더나 푸터도 딱히 크기를 변경하거나 할 일 없이 템플릿에 있는 이미지와 색깔만 딱 바꿨다. 쌩쌩하게 너무 잘 돈다. 분명 욕심을 더 낼 순 있지만, 여기서 만족해야만 비로소 홈페이지 작업을 손에서 털 수 있다. 그렇게 딱 그까지만 하고, 나중에 기능이 더 필요하거나 여유나 짬이 생길 때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빌더 편집 페이지를 닫았다.

비버 빌더

별거 아닌 기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서 이 테마 저 테마 헤매고 다녀도 해소하지 못한걸 딱 이렇게 유료 결제 한 방에 끝났다. 이것이 유료의 힘이 아닐까. 그러다 이제 좀 빌더라는 맛을 봤으니, 다시 빌더 순위를 검색해 본다. 설명글을 보면 이전과 달리, 이제 좀 익숙한 단어가 여럿,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유료 결제는 자유 해방 비용이 아니라, 워드프레스와 친해지기 위한 가입비였을지도 모르겠다.

블랙 프라이데이, 사이버 먼데이 그리고 유료 플러그인

우연히 첫 유료 결제 시점이 블랙 프라이데이나 사이버 먼데이랑 겹쳤던 사람들한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비버빌더는 1년마다 라이선스를 갱신해야 하는 빌더다. 라이선스 만료까지 반년 정도 남은 시점에 구글 애드센스 광고창에 할인 광고가 뜨고, 커뮤니티에서도 할인 정보가 올라온다. 마음이 움직인다. 쓰고 있는 빌더의 라이선스를 할인 금액으로 연장할지, 할인 찬스에 다른 빌더를 새로 경험해 볼지 고민에 빠진다. 답이 없는 문제다. 그냥 지금 쓰는 빌더에 큰 문제가 없다면 연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베스트가 맞다. 하지만 왠지 남의 떡이 커 보이고 좋아 보인다. 우연히 나갔던 밋업에서 왠지 나는 소외 계층의 빌더를 쓰는 느낌을 받는다. 갈아타야 하나? 갈아타는 순간, 지금까지 빌더로 만든 페이지를 모두 새로 맞춰야 한다. 돈도 쓰는데, 각오도 해야 한다. 망설임은 당연한 거다.

나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디비 빌더(Divi)를 라이프타임 라이선스로 구매했다. 하지만 역시 걱정했던 그대로였다. 라이선스 소지만 한 채로, 아무런 변화없이 시간이 흘렀다. 디비 빌더를 쓸 계기가 필요했다. 계기가 없다면, 잘 돌고 있는 페이지를 굳이 뒤집어엎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문제는 한 개 두 개 사보니, 또 다른 빌더가 눈에 들어온다. 병이 된 거다. 이거 수집해서 뭐한다고... 그래도 역시 결제라는 허들은 나를 잘 참게 만드는 조력자였다.

계기는 우연히 온다

계기를 만든 건 내 자의가 아니었다. 신규 사이트 구축을 해야 할 일이 생겼고, 디자인 요소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이트였다. 어쩌면 최고의 계기가 아니었을까. 대신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다.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려야 했다. 그런데 데드라인이 있었다. 결국 하얀 도화지를 가득 채우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확실하게 필요한 페이지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비버 빌더와는 다른 맛이었다. 뭔가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컸다. 기본으로 제공하는 블럭 모양이나 포스트 디자인 설정 방식이 많이 달랐다.

디비 빌더 4

어쩌면 비버 빌더는 내가 디비 빌더만큼 깊이 안 봤던 것일 수 있다. 적용하는 시절도 다르고 버전도 다르고 다 다르지 않은가. 우여곡절 끝에 디비 빌더로 디자인이 거의 없는 페이지를 올렸다. 이렇게 디자인이 없을 거라면 왜 디비 빌더를 썼던 거냐며, 아무것도 없는 깡통 워드프레스에 똑같은 콘텐츠만 나열해 봤다. 디자인이 없는 그 자체도 이미 디자인이 있던 거고 설정값이 있던 거라는 걸 한 방에 알게 됐다.

새 계기가 오니, 왔던 계기는 사라졌다

사이트를 만드는 일 자체가 주업이 아니었으니, 굳이 내가 찾지 않는 이상 더 이상 계기는 안 생기리라 생각했다. 지인의 긴급 구조 요청이었다. 열어봤더니 익숙히 들었던 엘리멘터(Elementor) 빌더였다. 사용 방향성은 디비 빌더와 일맥상통했다. 엘리멘터 빌더에 익숙해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엘리멘터 빌더에 익숙해지고 나니, 디비 빌더가 어색해졌단 사실이다. 분명히 둘 사이 결은 비슷했는데, 어째서 디비 빌더가 손에 익지 않는걸까? 신기하다. 마침, 디비 빌더로 만든 사이트는 그대로 잘 동작하고 있었기에 더 건드릴 일도 안 생기고... 우연히 왔던 계기가 홀연히 갔다. 어쨌든 라이프타임 라이선스니까 언젠가는 다시 보는 날이 오지 않겠느냔 아쉬움만 남았다.

엘리멘터 빌더

그리고 커뮤니티에서는 이제 디비 빌더나 엘리멘터 빌더가 아닌, 다른 빌더 이야기가 들린다. 구글 애드센스나 페이스북 광고에도 다른 빌더 이야기가 올라온다. 그런데 이젠 AI까지 겹쳐서 사이트 빌더 자체가 변모하는 과도기를 거치는 중이다. 아직 AI로 맨땅에서 DB까지 만들어서 붙인 사이트 사례는 거의 못 봤다. 랜딩 페이지나 단순 유틸리티 페이지가 대부분이었다. 베이스에 CMS가 깔려있는 헤드리스 CMS위에 올린 사이트가 나올지, 전체를 AI가 알아서 만드는 게 나올지는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 JAM STACK도 워낙 잘 돼 있으니, DB를 쓰는 사이트라면 AI도 베이스에 특정 프레임워크나 스택이 있는 상태로 올라가지 않을까 싶긴 하다.

억지로 계기를 만들었다

묵혀있던 디비 빌더 라이선스를 꺼냈다. 이 블로그에 이것저것 끄적이며, 껍데기를 천천히 하나씩 만들어볼 생각이다. 말 그대로 억지로 만든 계기다. 마침, 디비 빌더도 버전 5를 준비하며 계속 베타버전 안내를 하길래, 금방 정식 버전이 올라가겠지 싶었다. 그래서 자주 보지도 않을 텐데, 애초에 5버전에 익숙해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냥 헤더와 푸터 만드는 것부터 너무 헤매는 중이다. 고정 크기와 비율이 유지됐으면 하는 이미지는 자꾸 비율이 찌그러지고, 넘지 말아야 할 폭을 자꾸 넘어가며, 기대했던 설정 메뉴가 잘 찾아지지 않는다. 강제성이 없는 계기라서 나의 탐구력도 너무 떨어지고, AI한테 질의를 보내봐도 아직 정보가 미숙한 버전이다 보니 자꾸 하드 코딩한 CSS 코드를 준다.

디비 빌더 5

AI들아... 내가 하드 코딩한 CSS를 넣을 거라면, 애초에 빌더를 안 썼지 않았을까? 엘리멘터 빌더는 질의를 하면 설정 버튼 위치를 꼼꼼하게 안내해주더니... 곧 서로서로 다 함께 업데이트되기를 기다려본다. 급하지 않으니까.